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우표와 수집/우취자료

[스크랩] 구한국 국제우편실시 (퍼온글)

《국제우편의 실시》

통신원(通信院)이 독립된 현업관청(現業官廳)으로서 등장했고 만국우편연합(萬國郵便聯合)에 가입하자 명실공히 우리 나라에서도 국제우편이 실시되게 되었다. 광무(光武) 4년(1900) 1월 1일부터 국제우편은 실시[註29]가 되었는데 이에 앞서 외체규칙(外遞規則, 만국우체규칙(萬國郵遞規則) 12조, 세칙(細則) 19조, 교환사(交換司)의 집무규칙(執務規則) 46조)을 만들어 배부하였다. 아울러 영문으로 된 안내장도 많이 돌렸다고 한다. 이렇게 준비 관계로 당초 실시 예정보다 1년 늦게 실시된 국제우편은 그 교환국(交換局)을 서울 · 인천 · 무안(務安) · 부산 · 원산(元山) · 삼화(三和)의 6개 우체사(郵遞司)가 지정을 받았다.

그러면 국제우편이 실시된 1900년의 한해 동안의 이용 상황 중에서 당시의 우편요금과 서울 우체사의 경우는 <표 : 1900년(광무 4년) 국제우편 요금>, <표 : 1900년(광무 4년) 서울 우체사(郵遞司)의 수입금(원)>과 같다.[註30]

그러면 이 무렵에 발행된 우표와 엽서는 어떠한 것이었던가?
고종 21년(1884)에는 일본에서 문위(文位) 우표를, 고종 32년(1895)에는 미국에서 태극 우표를 인쇄해 왔다. 그런데 건양(建陽) 원년(1896)에는 우표를 국내에서 제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. 즉 농상공부(農商工部)에서 우표 · 엽서 · 상표 인쇄용이라는 명목으로 석판(石版) 인쇄기기의 구입비 오천원을 각의(閣議)에 상정(上程), 요구한 사실이 그것이다. 그러나 이러한 발안(發案)이 실현된 것은 3년이 지나서 광무 3년(1899)이었다. 그 때 도입된 기계는 독일제였다고 한다.[註31]

그리하여 다음 해인 1900년 1월부터 2리(厘)에서 2원(圜)짜리까지 모두 13종류의 우표와 4종류의 엽서가 발행되었는데 이화(李花) 우표가 이 때에 나왔다. 이 우표는 주도안(主圖案)이 이화와 태극으로 되어 있는데 '대한뎨국우표' '大韓帝國郵票' 'IMPERIAL KOREAN POST'라고 국 · 한 · 영문이 씌어졌다. 이 우표는 '퍽 섬세하여 한국적인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아주 귀여운 우표'[註32]라고 한다.

그리고 우리 나라 최초의 기념 우표가 1902년 10월에 발행되었다. 즉 고종 황제의 어극(御極) 40년을 기념하는 우표였으며 지금 세종로에 있는 기념비각(紀念碑閣)도 그 기념 행사의 하나로 건립된 것이다. 이 기념 우표는 10월 18일에 발매된 듯 당일 소인(消印)된 우표가 있다 한다.

이 우표가 우리 나라 최초의 기념 우표이므로 상세히 알아보기로 하면 '도안(圖案)은 중앙에 왕관을 그려 ◇형으로 둘러싸고 ◇형의 4귀에는 이화를 그렸으며 주위는 이화와 당초문양(唐草文樣)으로 장식되어 있다. 여기 그려진 왕관은 원유관(遠遊冠, 왕이 조하(朝賀) 때 쓰던 관. 검은 비단으로 만든 것인데 양(梁)이 9개이고, 그 전후에 9개의 오색옥을 붙였으며, 또 금잠(金簪)과 주뉴(朱紐)를 갖추었다.)이며 왕이 조하(朝賀)에 나올 때 쓰던 것이다. 전년 9월에 제정한 고종황제성수오십년칭경기념장(高宗皇帝聖壽五十年稱慶紀念長, 메달)에도 이 원유관이 그려져 있고 어극사십년기념장에도 역시 같은 왕관이 그려져 있다. 왕관에는 이 외에도 정관(正冠)인 면류관(冕旒冠)과 평복(平服)으로 정무(政務)를 다스릴 때 쓰던 익선관(翼蟬冠)이 있었는데 지금 구황실(舊皇室)에는 익선관만 남아 있다 한다.

'大韓帝國郵票' 'POSTES DE COREE'라고 한문과 불문(佛文)으로 국명을 표시하고 한글은 씌어져 있지 않다. 현재까지의 우리 나라 우표 중에 국문표시가 없는 예는 이 우표 뿐이고 태극도(太極圖)도 그려져 있지 않다. '大皇帝陛下 御極四十年慶祝' 'XL ANN JUBILE DAVENEMENT'의 문자가 씌어졌고 네 귀에 가격표시가 누에고치형 안에 '三錢' '3'이라고 들어 있는데 우연한 일인지 의식적으로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다. 일본인 기술자의 원도(原圖)라는 설도 있으나 확실한 기록은 없다. 인면(印面)은 가로 26mm, 세로 30mm이고 등황색의 철판(凸版) 인쇄, 5×10의 50장 시이트이다. 발행 장수는 5만장이고 대한제국전환국제조(大韓帝國典**局製造)이나 명판(銘版)은 없다. 한국우표목록에 대한제국농상공부인쇄국제조(大韓帝國農商工部印刷局製造), 10월 21일 발행으로 되어 있음은 잘못일 것이다. 한성총사(漢城總司)와 부산사(釜山司)에서는 기간의 제한 없이 발매한 기록이 보이며 인천사(仁川司)의 소인도 있다.[註33]

이것과 아울러 광무 7년(1903) 6월 1일에 프랑스에서 만들어 온 발행수량 미상의 소위 독수리 우표 13종류가 있다. 이 우표의 특색은 인쇄가 정교하고 오작(誤作)과 변종(變種)이 전혀 없다고 한다. 하지만 '독수리가 주도안이 된 이 우표는 분명히 한국적인 것이 되지 않고… 서구적인 냄새를 풍긴다'[註34]고 평가되며 이 우표를 마지막으로 조선 왕조에서는 다시는 우표를 발행하지 않았다.

다음은 엽서에 대하여 알아보자. 엽서가 처음 우편에 쓰이기 시작한 것은 고종 6년(1869) 10월 1일, 오스트리아 · 헝가리에서 였다 하고 독일에서 실제로 이 엽서를 발행한 것은 1870년 6월 25일이었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광무 4년(1900) 5월 10일 우체엽서(郵遞葉書)라는 이름으로 발행된 국내용 일전(壹錢) 엽서가 최초의 것이다.[註35] 국내통상(國內通常, 1전), 국내왕복(國內往復, 2전), 국제통상(國際通常, 4전), 국제왕복(國際往復, 8전)의 4종류가 있는데 제1차로 나온 것은 1900년과 1901년에 국내 인쇄로 발행되고 제2차로 1903년 프랑스에서 독수리 우표와 같이 주문하여 발행되었다.

[註29]농상공부령(農商工部令) 제38호
[註30]광무 4년도 우체수입금 보고서
[註31]진기홍(陳錤洪) 『구한국시대의 우표와 우정(郵政)』 p.46
[註32]진기홍(陳錤洪) 『구한국시대의 우표와 우정(郵政)』 p.46
[註33]진기홍(陳錤洪) 『구한국시대의 우표와 우정(郵政)』 pp.51∼52
[註34]진기홍(陳錤洪) 『구한국시대의 우표와 우정(郵政)』 p.60
[註35]관보(官報) 1573호

[원문출처] http://seoul600.visitseoul.net/seoul-history/sidaesa/txt/5-8-6-4-5.html
출처 : 우표와 취미
글쓴이 : sandsun 원글보기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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